칠순이 넘은 농부조차 처음 겪는다는 큰 가뭄을 이겨내고 이룬 결실이라 그 풍성함이 더욱 대견스럽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풍성함을 일궈낸 농민들의 가슴은 오히려 가뭄때 보다 더욱 바짝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수확기 쌀값 하락에 대한 우울한 소식이 농촌사회를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1년 봄부터 시작하여 농민들에게 최대의 관심거리이자 시청률을 기록하고 얼마전 막을 내린 정부 연출, 농협 조연출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목이 '쌀대책'인 이 드라마는 우리 농업의 마지막 보루인 '쌀'이 가격하락의 위기를 맞으면서 '쌀값'을 둘러싸고 전개된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는 모내기가 한창일 무렵 가을이면 쌀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농촌사회에 떠돌면서 시작합니다. 여름이 되면서 소문은 더욱 확산되고 부풀려지더니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 농민들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이쯤 되면 자칭 농업을 위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눈만 뜨면 싸움인 정치권도 여야가 한목소리로 쌀대책을 요구하고, 대통령도 쌀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농협은 또 농협마다 현수막을 걸고 '특단의 쌀대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지난 봄의 '가뭄'이 그대로 '쌀'로 바뀐 가운데 연일 농업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맞장구를 쳐줍니다.
이 무렵 농민들의 관심은 온통 드라마가 '어떻게 막을 내릴 것인가'에 집중되었습니다. 마침내 드라마는 정부가 8월 29일과 9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단기 및 중장기 '쌀대책'을 발표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드라마가 끝난후에도 박수를 보내는 농민은 한 명도 없고 오히려 연출을 맡은 정부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폭발시킬 태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쌀대책'의 결론은 한마디로 쌀에 대한 정부의 가격지지정책 포기와 쌀 수입개방에 대비한 쌀값하락 유도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농업의 마지막 보루인 쌀농사의 포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정부는 드라마의 시작부터 '쌀농사포기'의 결론을 정해 놓고도 마치 농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쌀대책'을 내 놓을 것처럼 농민들을 우롱해 왔기 때문에 지켜본 농민의 분노는 더욱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쌀값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 넘긴채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농협 또한 농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일년동안 땀으로 일구어낸 결실을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동시에 농민들은 정부의 '쌀대책'으로 인한 분노를 갖고 농민 연출, 국민 조연출의 새로운 드라마를 제작해야 합니다.
농민이 앞장서고 국민이 동참하여 정부의 농산물 수입개방 정책에 희생당한 쌀을 살리고 우리 농업을 지키는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야 합니다. 통일을 대비하여 남과북의 국민 모두가 먹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식량자급의 토대를 만들어내는 희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 스스로 드라마의 제작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북에서 전남으로,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쌀투쟁은 한편의 드라마 입니다. 농민들의 승리로 2001년의 대미를 장식할 희망의 '가을동화'입니다.
2001년 가을의 문턱에서...
조경희(김제농민회 정책실장)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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