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면에서 제법 큰 규모의 딸기농사를 짓는 최한일씨에게 올 해는 악몽과 같은 해이다. 지난 98년 여느 때와 같이 밭에 나가 딸기 손질을 하던 그는 마을 이장으로부터 귀가 솔깃해지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번에 정부에서 시설현대화 정책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했는데 연리 5%에 2년 뒤부터 상환하면 된다고 하더라구... 자네도 한 번 신청해 보지 그러나?"
안 그래도 평소 계절 관계없이 딸기를 재배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 오던 최씨로서는 이 참에 비닐하우스라도 쳐 볼 요량으로 당장 농협에 달려갔다.
"이번 정부에서는 유리온실을 적극 장려하고 있거든요. 비닐보다야 유리가 훨씬 수명도 길고 빛도 잘 들고 무엇보다 폼이 나잖아요. 어떻게 하실래요" 담당자의 말에 최씨는 1억원의 시설자금을 신청했고 보증인을 세워야 된다기에 백산면에서 돼지를 키우는 장인어른과 처조카를 연대보증인으로 내세웠다. 때마침 그 사람들도 축사를 새로 짓기 위해 정책자금을 신청한 터라 서로 보증을 서 주기로 얘기가 오갔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딸기밭에 멋드러지게 들어선 유리온실을 바라볼 때의 그 흐뭇함... 그러나 그때만해도 그는 일이 이렇게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재미가 솔솔하진 않아도 대출이자 갚고 애들 공부시키는면서도 그럭 저럭 먹고 살만했던 최한일씨였다. 그러나 지난해 세상 겪어 보지 못한 강풍을 동반한 태풍 '볼가'의 위력에 유리온실이 통채로 날아가 버리고 전에 농협에서 빌려 쓴 상호금융 대출금 1천만원의 만기가 닥쳐오면서 그는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연대보증을 서 줬던 장인어른과 처조카가 돼지값 폭락으로 주저 앉으면서 그들의 빚까지 떠 안게 돼 그저 자신의 처지가 기가 찰 뿐이다.
팔자 탓이나 하며 매일같이 소주로 지새우던 최씨에게 문득 주변에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농민들이 쌔고 쌨다는 사실은 큰 의문으로 다가왔다.
'농민들의 소득수준을 무시한 무리한 농업현대화, 규모화 계획 추진' '이로 인해 파생한 정책자금의 남발', '작목 집중 등 정부 실정으로 인한 농산물가격 폭락', '가격 불안정 조정 실패에 따른 농가소득 안정 위협', 'IMF 상황을 불러와 농산물 시장의 몰락과 농업경영비 증가 야기'...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이같은 진단에 이르자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농민들은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상으로 생각해 본 이 이야기는 지금의 현실과 전혀 무관치 않다.
지난 달 21일 한농연을 비롯한 전국의 농민단체들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1백만 농민 총궐기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농민들은 '농가부채특별법 제정'과 '농촌회생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마련'을 요구하며 파산 일보직전에 놓인 농민들의 고통과 시름을 정부가 책임지고 덜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농민들은 항의 표시로 농가부채의 이자를 농작물로 지급하는 현물상환 및 농기계 반납 투쟁에 나서고 있으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도로 점거 투쟁을 강행하기도 했다.
정부는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몇가지 협상안을 내놓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는 사탕발림일 뿐이었다.
이런 농민들의 외침에 대해 일부 시민들에게서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딸기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인 최한일씨의 이야기처럼, 시위현장에 있는 농민 모두는 농사짓는 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빚 걱정 없는 예전의 농촌 풍경이 그리울 뿐이다.
벼랑끝에 몰려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는 지금의 농촌현실이 과연 농민들 만의 탓일까?
김재명 기자 kjm@kimjenews.co.kr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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