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선녀 수필갇상정보건진료소장

 하늘과 맞닿은 구릉 아래로 널따란 초원이, 사진기의 앵글에 잡힌 것처럼 눈앞에 펼쳐지네요. 화면을 당겨보니 꿈결일까요, 온갖 풀꽃들이 피어 있는 꽃동산입니다. 각자의 파트를 맡아 합창을 부르는 듯해서, 마치 공교한 노래를 눈으로 보는 것 같아요. 

  바로 우리 마을 뒤편에 있는 종축시험소 이야기랍니다. 넓게 조성된 목초지에 해마다 사초를 길러 소의 여물을 장만하는데요, 그 곳을 지나칠 때마다 저는 속도를 줄이곤 했답니다. 

 터진 초지가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가끔은 무리지어 앉은 백로를 만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늘 봐왔던 풍경이 아닙니다. 초록 일색이던 풀밭에 화려한 색들이 모여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라니! 들판 가득 꽃물결이에요. 꽃으로 색실을 자아 아름다운 베를 짜놓은 듯해요.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요. 봄부터 아니 그전부터 쉬지 않고 일해 왔을 테지요. 변덕스런 봄 날씨에 감기를 끌어안고 집안에서만 뭉그적대던 그 사이에도, 이 녀석들은 가만가만 꽃물을 들이고 있었던 게지요. 

 염치없는 소리지만 하느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아닐까요. 팍팍하고 메말라있는 지금, 이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요. 공중에다 베틀을 띄우고 구름 속에 잉아를 걸어 베틀가를 부르라 하셨겠지요. 바람이 색실을 물고 달려가면 햇볕이 쿵 밟아 눌러 진하게 쟁였을 테지요. 그만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보랏빛 무늬를 만든 것은 광대나물 꽃이네요. 어린 순은 나물로도 먹고 코피가 날 때 쓰기도 했다는 그 들풀. 왜 광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이 꽃을 글쓰기 교실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름을 맞춰보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아는 척 하는 녀석이 없더라고요. 꽃모양이 광대가 쓰는 모자를 닮았다고 생각지 않니. 코딱지풀이라는 별명도 있는데 보글보글한 잎 모양을 한 번 만져보렴. 지금쯤 청년이 되었을 녀석들은 하마 이 이름을 잊어버렸을까요? 

  꽃이 핀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치 검지를 펴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아요. 그만 멈칫거리고 네가 원하는 쪽을 향해 가렴,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아요. 사실, 너무 힘겨워서 털썩 주저앉아 있었거든요. 내가 원하는 삶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요.

  한줄기에 피어있는 꽃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보았어요. 줄기를 감싸 이십여 송이가 꽃다발을 만든 것을 네댓 마디 달고 있으니 와아, 백여 송이 되나 봐요. 자잘한 꽃이 한 코 한 코 보랏빛 레이스를 떠서 온 들판을 이토록 찬란하게 장식한 거죠. 한걸음, 한걸음이 소중한 것을요. 

 딸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데려 왔어요. 그런데 남편이 시간 약속이 있다고 조급해 하는 바람에, 차에서 창문만 내리고 바라보고 있어요. 그렇게라도 보고 지나치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사진을 찍고 있던 분들이 다가왔어요. 멀리 대구에서 온 사진작가 일행인데 가족을 찍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협조를 부탁하더군요. 

  우리는 차에서 내려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갔지요.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하나 두울 셋 하며 번쩍 들어올리기도 하고, 목마를 태우기도 하고요. 포즈를 취하느라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는데도 아이는 계속하자고 졸랐어요. 그 함박만한 웃음이라니. 언제 이렇게 행복하게 해 줬던가요. 아이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흰 냉이꽃과 노란 꽃다지도 줄을 서서 박수를 쳐주네요. 소똥을 밟으면 어쩌나, 웅덩이라도 패여 있는 것을 아닐까 했던 것은 괜한 걱정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요즘 아이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조심해'였던 것 같아요. 겁 없이 덤벼드니 다칠까봐 걱정이 돼서요. 아이를 자연과 함께 뒹굴며 자라게 하리라 했던 제 다짐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무릎 까진다고, 얼굴 탄다고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말리고 있으니 참 한심한 엄마지요. 늦게 얻은 딸을 제대로 키워보리라 했는데요.

  이십여 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종축장의 이런 풍경은 처음이에요. 목초를 파종하긴 했는데 그만 너무 가물어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결과라고 해요. 그래서 들풀이 점령한 것이라고요. 인간의 마음대로 경작 하지 않고 내버려 두니, 땅이 제대로 소생하고 있나 봐요. 우리는 잡초라고 부르지만 저들은 자기가 주인인걸요.

  사람들도 자연 그대로가 좋은가 봐요. 꾸미고 고치고 칠하는데 질린 게지요. 차댈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즐거워합니다. 무거운 삶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자연이니까요. 어떤 이는 이곳을 이대로 살려서 공원화하면 좋겠다고 하는군요. 보리밭이나 메밀밭을 조성해서 축제를 벌이는 곳보다 훨씬 나을 거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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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동안 제게 와준 풍경이지만 너무 황홀한 선물이었어요. 마음에 찍혀 언제까지나 빛바래지 않을 것 같아요. 하찮은 들풀도 꽃을 피워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주는데, 저는 언제쯤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야겠어요.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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