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만경여고 교사)

  성~
  방금 도착했어요. 방학하자마자 초등학생이 숙제하듯 가족여행에 점을 찍고는 제주에 발을 들여 놓았어요. 걷고 싶었어요. 짱짱한 햇볕 속도 좋고, 우줄우줄 빗속도 좋아요. 파도가 달려드는 바다도 좋고, 풀과 나무가 무성한 산도 좋아요. 아무 생각이 없어도 좋고 뭔가 생각을 해도 좋겠어요. 내가 더 자라거나 깊어져도 좋고 그냥 더 철없어져도 좋겠네요.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얻고 싶은 것도 없이 그냥 걷고 싶었지요.

  내가 나로 온전하게 산 날보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에 얹혀 기계처럼 살아낸 날이 더 많았어요. 몸이 떠난다고 틀을 떠날 수는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것들은 어쩌면 세상 마지막까지 나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신이 내게 주신 시간을 조금이라도 내가 온전하게 누리고 싶었어요. 

 도착하자마자 식당에 갔는데 콩잎으로 차린 상이 나왔어요. 청각과 초고추장, 차가운 된장물국도 나왔어요. 된장을 차가운 물에 풀어서 오이냉국처럼 떠먹는 된장물국이예요. 모두 낯설었어요. 난 밥상위에서 아직도 푸르게 흔들리고 있는 콩잎에 눈길이 닿았어요. 전에도 콩잎을 먹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어요. 어쩐지 껄끄러울 거라는 생각에 나는 콩잎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요. 점심 상위에서 여린 콩잎이 선풍기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어요. 문득 성이 생각났어요. 

 작은 들풀이 아름답다고 하던 성에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던 것 기억나나요?
  아주 작은 바람에도 정직한 떨림을 갖고 있어서 그런다고 대답했어요. 여기서 성은 흔들림이라고 말하지 않고 떨림이라고 말했어요. 

  가만 생각해보니 세상에는 많은 떨림이 있네요. 여리고 약한 토끼가 호랑이를 만났을 때의 떨림이 있어요. 두려움에 '벌벌' 떨거나 '와들와들' 떨었겠지요. 한 겨울 추위가 주는 떨림도 있네요. 수험생의 떨림도 있고 첫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부모의 떨림도 있어요. 맞선의 떨림, 첫 출근의 떨림, 복권을 긁을 때의 떨림도 있네요.

 기타 줄도 떨어서 소리를 내고 하모니카도 입김만큼 정직하게 떠는 떨림판이 소리를 만들어요.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했거나 '낭창낭창'하게 당겨 소리가 되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천지창조도 떨림으로 시작되네요. 태초의 혼돈이 엄청난 떨림으로 가시며 하늘과 땅이 생겼네요. 정말 많은 떨림이 세상을 세상이게 하네요.

  자그마한 씨앗은 비록 어둠 속에 있지만 큰 나무가 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얼마나 떨렸을까요? 기대와 설렘으로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오며 얼마나 떨었을까요? 작은 씨앗이 가진 건강하고 정직한 떨림이 꽁꽁 언 땅과 단단한 아스팔트를 밀고 나오는 힘이 되지요. 작고 여린 떨림이 엄청난 에너지가 되네요.

  나도 올레길 걷는 동안 떨림을 만날까요? 햇살이 나를 켜는 대로 팽팽하게 떨릴 수 있을까요? 내 안에도 하모니카처럼 정직한 떨림판이 있을까요. 새벽에 길을 나서 어둠 속을 걸으면서 나도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건강하게 떨릴까요. 겉으로는 원하는 것도 없고 설렘도 없지만 내 안에 나 모르는 작은 떨림이 있어 엄청난 에너지가 될까요.   

  흔들림이 존재 밖에서 타의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라면 떨림은 존재 안에서 자의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네요. 흔들림이 존재가 휘청거리는 시간이면 떨림은 마음이 반짝이는 시간이네요. 기대가 있는 사람만 떨림이 있데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 때문이든 떨림이 있을 때 새로워지데요. 토끼의 떨림은 존재의 끝에서 오지만 먹히면 먹히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새로운 떨림이 시작되겠지요. 기다리던 아이를 얻어 부모가 되어도 다른 떨림이 시작될 테고, 소리를 만든 악기도 또 다른 예감으로 떨리겠지요.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도 다시 떨림을 갖겠지요.

  미루나무 작은 잎의 떨림으로 바람이 불지, 바람이 불어서 미루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데요. 바람도 하나의 떨림이지요? 모든 존재는 제가 가진 떨림으로 새로운 떨림을 부르네요. 아니 사람이든 사물이든 떨림이 있어야 존재한다고 할 만하네요. 흔들림이 아닌 떨림이야말로 존재를 존재하게 하네요. 정직한 떨림을 갖고 있는 들풀이 아름답다는 성의 말이 울림이 깊네요. 들풀의 정직한 떨림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으려고요.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떨림이 내게로 와 또 하나의 떨림이 되리란 예감만으로 나 지금 떨리기 시작해요.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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