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으로 뭉친 세 여인

죽산면의 입구 쪽에 자리잡고있는 옥성리 신흥마을.

방앗간을 돌아 좁은 골목 쪽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낡은 2층집이 하나 눈에 띈다.

색이 바랜 벽돌하며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래기 넝쿨, 그리고 주변으로 보이는 논·밭.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나무문을 노크해보니 한꺼번에 세 명의 여인(?)이 나와 기자를 맞아주었다.

아직 소녀 같은 얼굴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이국적인 외모의 젊은 여인.
언뜻 보면 어린 아가씨로 착각할 수도 있으련만 강보에 쌓인 채 품에 안긴 아기는 그녀가 유부녀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후덕한 인상에 작은 눈의 중년여인(?).
검은머리에 다소 주름이 적은 얼굴이지만 분명 노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축을 받고 서있는 백발노파로 시선이 가자 할머니라는 표현을 쓰기가 무척이나 난감해진다.

자그마한 체구에 새하얀 백발의 할머니.
주름 가득한 얼굴과 손을 봤을 때 확실히 고령이지만 흑백이 유달리 선명한 두 눈은 쉽사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해준다.

101, 74, 23…
각각 시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라는 호칭으로 규정되어있는 그녀들의 나이다.

반세기를 수절과부로 지낸 최언년 할머니

올해로 최언년(101) 할머니는 100살을 넘겼다.
사회 전체적으로 장수인구가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100세를 넘긴 나이를 가지고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 세기를 넘게 살아왔다는 것에는 분명 건강 말고도 다른 여러가지 부가요소들이 숨겨져 있으리라.

아직도 반짝거림을 간직한 눈망울에 표정자체에 각인 되듯 새겨진 은은한 미소, 급격히 어두워진 귀는 주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힘들 지경까지 되었지만 말을 하는 상대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은 세월 속에 스며들어있는 자상한 배려가 가득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김씨 집안에 시집와 아들 셋과 딸 셋을 낳는 동안 '일제강점기' '6.25' 등 시련의 역사 속에서 온갖 모진 풍파를 겪어왔으며 50년 전에는 평생의 친구라는 남편과도 사별했다.

한 세기를 넘겨온 세월의 강은 모질게도 길었나보다.
어머니는 이렇게 정정히 살아있건만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자녀들은 아들 둘에 딸 하나 뿐이다.

남편에 이어 분신과도 같은 혈육마저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말았다.
지나간 상처가 얼마나 많으며 경험했던 상실의 양 또한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으랴…

이제 더 이상은 어떤 것도 욕심 부리지 않는 마음으로 그저 흘러가는 평온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길 뿐이다.

"할머니, 항상 건강하세요"

기자의 음성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두손을 꽉 잡아주는 최언년 할머니의 손길에는 따뜻한 온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74살 아주머니 정수복씨

"할머니라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한 나이건만 아직도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많이 듣게되네"

어린아이 마냥 볼멘소리를 뱉어내는 정수복(74)씨의 후덕한 얼굴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은 것 같아. 지금 내 나이에 아주머니 소리를 듣는 것도 여자로서는 그런 데로 괜찮은 소리거든"

그녀를 가리키는 말들은 무척이나 많다.
손자·손녀, 아들·며느리, 딸·사위 등에게서 불려지는 할머니, 어머니, 시어머니, 장모님.

많은 자손들을 거느리고있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서게되는 자리라지만 정수복씨에게는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호칭이 있다.

다름아닌 며느리가 바로 그것이다.
자손들에게 우대 받고 존경받기에 앞서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항상 보살펴 드려야하는 의무가 그녀에게 따라다닌다.

청하면에서 태어나 18살에 죽산으로 시집을 왔으니 시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것 만 해도 강산이 대여섯 번은 바뀐 세월이다.

무려 7명의 자녀를 가지고있고 해당되는 식구만 해도 수십명이지만 여전히 최언년 할머니를 수발 드는 것은 정수복씨의 몫이다.

"뭐, 하도 오랫동안 같이 있다보니 이제는 시어머니라는 생각도 안 들어. 그저 평생을 같이하는 또 다른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유달리 붉은 양 볼을 감싸며 수줍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수복씨의 얼굴은 만년 소녀 같은 표정이었다.

베트남에서 날아온 신부 원금봉씨

약간은 이국적인 외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금봉(22·베트남 이름: 윙씨김범)씨는 한국사람이 아니다.

작년 10월에 결혼했으니 이곳 땅을 밟은지 채 반년이 되지 않았다.

시할머니는 물론이거니와 시어머니와도 50살이 넘는 나이차이가 난다.

언뜻 보기에도 앳되어 보이는 꽃 같은 20대 초반의 나이.

때문에 얼마 전 아들을 낳자 주변에서는 얘가 얘를 낳았다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겉모습은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얼마나 당차고 씩씩한지 몰라. 얘가 나이만 다른 집 며느리들보다 조금 어릴뿐 집안 일이면 집안일, 살림이면 살림 거기다가 어른공경까지,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어"

며느리 얘기만 나오면 시어머니인 정수복씨는 갑자기 할말이 많아진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정신없이 늘어놓지만 자랑거리가 자꾸만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아주 복 덩어리가 들어왔어. 늙그막에 저렇게 예쁜 며느리를 보게 될 줄이야"

아직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원금봉씨지만 시어머니의 표정에서 자신을 칭찬한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운 듯 수줍게 고개를 숙인다.

따뜻한 나라에서 살았던 탓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이곳의 기후가 다소 춥게 느껴지는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적응이 빠른 원금봉씨다.

바인차이(쌀가루를 빻아 만든 쌈의 일종), 포(쌀 국수), 스프링롤(베트남 만두) 등 주로 쌀과 관련된 음식을 즐겨먹었던 탓인지 입맛 적응에도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원금봉씨를 편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요소는 너무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있다는 것이리라.

"처음에는 조금 외로웠지만 이제는 이곳이 고향 같고 너무 포근해요"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서툰 한국말을 내뱉는 원금봉씨의 얼굴에는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김종수  oetet@gjtimes.co.kr

<저작권자 © 김제시민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