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손가락 사이에 굳게 움켜쥐어진 먹물을 담뿍 묻힌 한 자루 붓이 파르르 떨리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붓끝을 지나 새하얀 백지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소박하지만 예리한 시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마부터 맺히기 시작한 땀은 어느새 붓을 쥔 손까지 흠뻑 적셔버렸다.

"휴우…"

가느다란 숨소리와 함께 그제 서야 한 여인이 붓을 놓고 옆으로 가지런하게 놓여져 있는 손수건을 집어 땀을 닦는다.

다소 긴장을 풀만도 하건만 그녀의 눈빛은 채 완성되지 않은 백지 위의 숲 속을 떠날 줄을 모른다.

먹의 짙고 옅음만으로 꾸며나가는 음영의 미 속에 감추어져 제각기 호흡하는 나무와 풀, 그리고 한쪽 구석의 돌계단.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진 돌계단은 분명 인공의 구조물임에도 자연 속에 동화되어 비바람에 깍여 나간 바위와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산뜻하고 시원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요? 그리고자하는 한 부분을 잘라내지 않고도 부드럽게 녹아들면서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한국화만의 최대매력이랍니다"

문화원 한국화 수강생 김수옥(37·신풍동)씨에게 3년 전부터 틈틈이 배워온 한국화는 이제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농협에서 근무하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비교적 빠른 22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지 십 수년,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하릴없이 세월만 흘러간다는 생각에 무심코 잡아본 붓 한 자루.

평소 이것저것 관심은 많아도 끈기가 없는 편이었던지라 전에 조금씩 손을 댔었던 것들처럼 몇 개월의 공염불로 끝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한국화의 유혹에 푹 빠져들었고 지금은 아마추어치고는 상당한 솜씨를 자랑하는 실력파가 되었다.

산, 들, 강, 하늘, 구름, 바위, 나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서만 담고있던 수많은 영상들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위에서 또 다른 세계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죽은 듯 잠들어있던 꿈들은 한올한올 꿈틀거리며 작지만 또렷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요. 전 그냥 흉내만 내는 것이라고요. 전 어디 가서 작품에 대해 말할 자격도 안되고 능력도 터무니없이 부족해요. 머리로는 대충 그림을 그려도 손이 안 따라가는 초보라고 들어보셨나요?"

작년도 아세아 미술대전 특선경력을 말하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는 기자에게 수줍은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김수옥씨다.

"실력은 안되지만 나만의 세상을 나만의 의지로 그릴 수 있다는 감성의 중독성 때문에 붓을 잡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기에 개인적으로는 너무너무 만족하고있는 하루하루 랍니다"

소녀같이 꾸밈없는 미소를 짓고있는 김수옥씨에게 요즘 가장 듣기 좋은 말은 먹물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소리다.

온몸과 마음 그리고 정성으로 자신만의 꿈을 깨워나가고 싶은 그녀이기에.

김종수  oetet@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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